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실제적인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50절에서 “숨을 거두셨다”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로마 백부장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5:39).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진짜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분의 부활도 진짜가 아닌 수사적인 표현에 그치고 맙니다.
“드디어 부활한 것일까. 마이크 트라웃이 개막 시리즈에서 놀라운 타격감으로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이것은 한 언론 기사의 일부 내용입니다. 여기서 ‘부활’이는 말은 진정한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부상 이후 타격 정확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이 선수가 개막전에 맹타를 친 것을 두고 부활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일시적인 부진 상태에 빠진 것을 죽음에 빗대고 거기에서 빠져나온 듯한 모습을 부활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을 우리는 종종 보고 우리도 또한 종종 사용합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잠자는 것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역동적인 과정을 묘사한 것이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부활’로 쓰인 ‘아나스타시스 ἀνάστασις)는 직역하면 ’다시 일어서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짐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다시는 죽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진실되게 죽음을 통과한 이후에 가능합니다.
부활주일입니다. 죽음조차 지나치게 가볍게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죽음이 가벼우니 부활도 한없이 가볍습니다. 죽음이 주는 공포와 슬픔 그리고 아픔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당장의 즐거움만 좇아가기 바쁜 시대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애써 외면한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주일에 예수의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무엇을 하다 죽을 것인가? 부활은 예수 안에서의 죽임일 때만 가능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