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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되고자 한다면

헌책7 2025. 3. 11. 18:21

누가복음 10:25-42 묵상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 속에는 큰 함정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모를리가 없는 율법교사의 호기로운 질문과 답은 핵심을 잃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람의 눈으로는 확연히 볼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만 아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눈으로 보이는 사랑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정작 이웃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랑만 외쳤듯이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서 네 자신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왜 그는 이웃을 몰랐을까요? 차별과 선입견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나 사마리안인과 교제는 부정한 일이라서 결코 그의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이웃은 자신과 같이 외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종교지도자들뿐이었습니다.

이를 이미 간파하신 예수님은 한 예화를 말씀하십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보았으나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막으로 데리고 간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옷이 벗겨져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알 수 없었고, 거의 죽게 되어 그를 만지면 자신도 부정해질 수 있다는 염려에 그들은 보고 피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외식적인 정결이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결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평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방인 취급하며 손가락질 하던 자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른다고 얼마나 구박하며 조롱했습니까? 모른다고 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도 알았고 사랑할 줄도 알았습니다. 반면에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안다고 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이웃도 몰라봤습니다.

자비를 베풀며 누군가의 이웃이 되려고 하는 자에게 이웃은 가까이 있습니다. 먼저 이웃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 나의 이웃을 찾으려고 할 때 이웃은 너무나 멀리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도 그 연장선입니다. 여성은 당시 관습에 의하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남자들만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으며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성인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에 엄청난 파격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분주한 마르다의 입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눈에 거슬렸습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차별이 없는 초청에 기꺼이 응한 마리아를 보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먼저 사람을 향한 선입견이나 차별을 십자가에 내려놓는 것부터 사랑은 시작됩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싫어하는 마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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