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3-23 묵상
지금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맹인은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단순히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무시당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조롱과 무관심으로 인한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선입견이나 편견을 깨고 약자인 맹인에게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하필 그날이 안식일인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분명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논쟁을 일으킬 것을 아시면서도 맹인의 눈을 치유하셨습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습니다.
의도적인 분쟁이나 다툼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시끄럽게 함으로 더 많이 잃을 자를 위협하고 잡음으로 인해 이득을 얻는 방식은 지금도 횡행하는 전략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근본정신으로 대처함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신앙의 근본, 믿음의 근본, 복음의 근본 등 평소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랑과 생명'이라는 안식일과 율법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비본질인 '안식일 준수'에만 집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자신들의 유리한 관점에서만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도 그렇듯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시각과 관점에서 보아야 함에도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관점만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비겁하게 종교권력을 눈 뜬 맹인의 부모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데 사용했습니다. 종교권력으로 맹인인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출교는 유대인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예수께서 치유하셨다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의 남용이나 오용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종교 권력의 오용이나 남용은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입니다. 본질을 향한 몸부림은 자기 이득에 안주하지 않고 도취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부인의 삶이 아니면 주님 앞에서 내가 부정됨을 두렵고 떨림으로 새기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