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하루 종일 열기와 빛을 뿜어내느라 지친 태양이살포시 구름에 기대어 특별히 기억될 만한 일도 없이흘러간 하루가 아쉬워기우는 태양을 잡으려는 듯 허우적거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오늘 네가 있어 행복했다''너의 존재만으로 큰 위로였다'고조용히 눈으로 속삭이는 듯하다

가랑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기꺼이 우산이 되어주려푸른 잎을 조금이라도 더 넓게 편다한참을 바라보니 꽃이 말을 건넨다그대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준 적이 있는가나 하나 살기에도 바쁜 때에한가롭게 누군가의 우산 되어 줄여력이 있겠나 싶은데 이미 많은 것을 이웃들에게 받고 있음을까맣게 잊고 살았음을 깨달았네

짙은 녹색의 잎은햇빛에 그을려 여기저기 타든 상흔이 남아있지만아랑곳 하지 않고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으로불그스레 꽃 한 송이 아름답게 피우며시름을 잊는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 앞에서한 나무가 자태를 뽐낸다주위에 있던 나무들 시샘하니봄바람 다가와 그 열기를 식히네

꽃과 나무 그리고 하늘이 아름다운 조화에구름 한 조각 자신도 끼어달라고 살며시 고개 내민다넉넉한 봄은더하면 더할수록 풍성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봄의 불청객 초미세먼지시샘 가득해여기저기 붙어 색을 흐린다 여린 꽃과 새순이영롱한 빛을 잃자 살며시 내린 비깨끗하게 씻어내준다어찌하리 이제 미세먼지도봄의 일부이니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쉼이 있는 삶그것은 사람만 필요한 것이 아닌가보다여럿 가정이 사는 빌라 입구비둘기 한 마리마치 자기 집 인냥떡하니 버티고 꿈적도 않는다삶의 휴식에 장소가 그리 중요한가쉼에 네 것 내 것이 그리 중요한가다 나그네 인생인데

새가 저공 활주하는 까닭은먹이를 찾기 위한 것도둥지를 찾기 위한 것도 아니다그저 높은 하늘을 난다고스스로 교만해질까봐자기를 낮추기 위한 것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고랑을 지나는 농부에게하이파이브high five손을 내민다삶에작은 격려는산 정상에서만나는 청량음료와 같다

울타리 하나 사이로밭과 집이 나란히 있다밭이 집이고집이 일터이다밭에만 오면 마음이 편하고집에만 오면 할 일들이 쌓인다